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10세 (문단 편집) === 여러 가지 전쟁들 === 레오 10세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역대 [[교황]]들이 교황령 기득권과 종주권 유지,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세력균형과 플러스로 메디치 가문 퍼주기까지 하려는 구상 때문에 치세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베네치아]]와 결탁하여 이탈리아 북부의 패권을 쥐려 했기 때문에, 1513년 4월 5일에는 그에 대항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 및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더불어 메헬린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좀 밀리는가 싶었는데 6월 노바라 전투에서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몰아내고야 말았다. 전쟁은 10월까지 계속됐지만 한 번 꺾여버린 전세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은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은 결국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런데 1515년 [[루이 12세]]의 후임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가, 9월 13일 협정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연합군은 다시 모였지만 프랑수아의 3만 8천 대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9월 14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패배하자[* 이때 프랑스 중기병은 랜스 차징으로 유럽 최고의 보병부대인 [[스위스 용병]]을 격파하는 위업을 보였다.] 교황은 그가 원하는 [[밀라노]]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동맹은 깨졌다. 이를 위해 12월 교황이 프랑수아 1세와 [[볼로냐]]에서 단독 비밀회동을 가지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상당히 아니꼬워했다고 한다. 1513년 12월 9일에는 제5의 라테란 공의회를 재개하여 피사 공의회를 재차 이교로 단정, 개최한 주교단을 ~~[[너 고소|너 파문]]~~ 파문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아무나 [[까]]지 못하는 발판을 공고히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공의회가 제대로 거둔 수확은 이것과 평화협정 뿐이었으며, 위에 언급된 정신없는 전쟁 때문에 교회 개혁 같은 문제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1516년에는 피렌체 공화국을 다스리던 동생 줄리아노가 세상을 떠나자, 형 피에로의 아들인 로렌초를 우르비노 공으로 임명하려고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1세를 파문하고 추방시켰다. 또한 로렌초를 프랑스 왕가와 혼인시켜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별로 성과는 거두지 못했는데, 로렌초가 딸 하나 남기고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딸이 바로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한편 빡친 로베레는 우르비노를 탈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순조롭게 재입성, 몬테 임페리알레에서는 비비에나 [[추기경]] 베르나르도 도비치가 이끈 군사를 신명나게 털어 페사로로 쫓아내지만 사비가 부족해서 전쟁을 종결시킨 뒤 만토바로 퇴각했다. 레오 10세는 이를 위해 [[교황청]] 금고를 탈탈 털었으며 [[알렉산데르 6세]]마냥 괜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교황과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닌~~ [[추기경]]단의 미움까지 샀다. 반면 로베레는 레오 10세가 사망한 해인 1521년 우르바노 공작위를 되찾는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은 메디치 가문 영지 만들기 전쟁에 참전하여 1515~1516년 약 2년간 80만 두카트를 탕진했는데, 재정난 타개를 위해 31명의 추기경을 한꺼번에 서임해서 비난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50만 두카트를 벌었다고 한다. 후임 교황 [[하드리아노 6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매관매직으로 팔아치운 자리였고 [[https://en.wikipedia.org/wiki/Cardinals_created_by_Leo_X|31명중엔 자신의 친족 조카와 사촌도 3명이 껴 있었기 때문(클레멘스 7세는 1513년에 이미 추기경으로 꽂았다.)]] 레오 10세의 사망 후 콘클라베에 참가한 [[추기경]]이 39명이었고, 후대 [[바오로 4세]] 시기 이후 20세기까지 추기경단이 약 70명 정도로 유지했는데, 재정난이 아무리 심했다 해도 비상식적인 파격 조치였다. 당연히 기존 추기경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자신을 미워하는 기존 추기경단을 그냥 두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사건 진위가 의심스러운 페트로치 추기경 암살모의 사건을 조작하여 알폰소 페트루치 추기경을 처형시키고, 나머지 반대파 추기경들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 페트로치 추기경이 자신의 주치의 베르첼리를 사주하여 '''치질 자리에 붙이는 고약에 독을 타려다가 발각되었다'''는 구실로 체포당했다. 페트로치 추기경은 레오 10세의 동성#애인(?)으로 추정될 정도로 상당히 총애받은 심복이었는데, 의사는 거열형에 처하고, 페트로치 추기경은 추기경을 차마 그리스도인이 처형할 수 없어서 무어인을 고용하여 교살시켰다고 한다. 나머지 추기경들은 거의 전재산을 싹싹 긁어서 조공으로 바친 후에야 용서받았다. 한편 교황 중심의 대 [[오스만 투르크]] [[십자군 전쟁|십자군 원정]]을 재추진하기 위해 원대한 계획을 짜고 [[헌금]]으로 기금을 모은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단결을 주재하려 했지만 황제 [[카를 5세]]를 비롯한 세속 군주들의 무관심으로 뭍혔다. 다만 여기에는 다른 사정도 있었는데,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십자군에 참가하라는 레오 10세의 제안에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하고 있는 판국에 어떻게 나라를 비우고 군대를 이끌고 멀리 원정을 갈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